예비군, 삽질, 참호

PUBLISHED 2007. 9. 12. 19:51
POSTED IN 오늘
오늘은 예비군 훈련이 있는 날이었다. 하반기 향방작계훈련 1차 보충 교육을 받고 왔다. 이로서 올해 예비군 훈련 일정을 모두 마쳤다. 훈련 일정은 이미 예비군 홈페이지를 통해 올해 알고 있는 터였다. 원래 8월 16일에 하반기 향방작계훈련 기본 교육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마침 그날 회사에서 중요한 회의가 있어 참석할 수 없었다. 동대에 연락해 봤더니 그냥 빠지고 보충 교육 때 참석하면 된다고 해서 잡힌 일정이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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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가 예비군 1년차다 보니 모든 게 처음이다. 지난 상반기 향방작계훈련은 산기슭에서 했는데 교과서에서나 보던 M1 "칼빈(Carbine)" 소총을 들고서 야산을 오르며 지형 지물을 익히는 훈련(?)을 받았다. 미군의 경우 칼빈 소총은 1960년대 이후 사용되지 않는다고 하고, 우리 군의 경우에도 예비군이 아니고서는 만질 수 없는, 현역병은 건드려 볼 수 없는 아주 희귀 품목이 되겠다. (아래 사진은 너무 예쁘게 나왔다. 실물을 보면 역사와 전통을 한눈에 느낄 수 있는데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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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1 칼빈 소총 (M1 Carbine rifle)




이번 훈련도 상반기 훈련과 비슷하게 진행될 것으로 예상했다. 점심 먹고 느긋하게 동사무소 옆 공원으로 향했다. 이미 여러 사람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편안한 자세와 복장으로 제각각의 취향에 맞춰 쉬고 있었다. 살짝 풀어 젖힌 단추와 썼다고 해야 할지 위에 얹어 놓았다고 해야 할지 애매한 모자가 보인다. 적이 우리를 바라보고 한눈에 방심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허점을 드러내는 고도의 심리 전술이다.

그래도 이번엔 운이 좋다. 때마침 직장 동료도 함께 훈련을 받으러 왔다. 지난 번 훈련에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혼자서 가만히 있어야 했는데, 오늘은 심심하지는 않겠다. 지난 훈련에는 심심할 때를 대비해 미리 PMP도 챙겨 갔지만 그것만으로는 몰려드는 지루함을 도저히 극복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말벗이 생겼으니 기운이 불끈 솟는다.

오후 한 시. 드디어 집합이다. 예상대로 본격적인 훈련에 앞서 동대장의 일장 연설이 시작되었다. 한참 동안 왜 들어야 하는지 잘 모르는 이야기를 듣고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제 칼빈 소총을 나눠 주려는 건가? 그런데 아니 이게 웬일인가! 소총 대신 삽을 내민다. 아, 오늘은 "총질"이 아니라 "삽질"이구나! 그리고 생수 한 병과 캔커피 하나씩을 건넨다. 열심히 하라고 이런 것도 나눠 주고, 고마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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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무기는 삽!


동대장이 외친다. "우로 어깨 걸어 삽!" 그리고 한 마디를 덧붙인다. "오늘의 훈련은 참호를 파는 일입니다!" 아, 정말 삽질하러 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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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삽질하는 미군 (http://h21.hani.co.kr/section-021107000/2004/11/021107000200411110531066.html)



동사무소를 지나 아파트 단지를 뚫고 근방에 있는 야산으로 향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처럼 보였는데 벌써 산책로가 나 있다. 군데군데 계단처럼 산책로를 공사한 곳도 보인다. 이웃 주민들이 산책하기에 참 좋아 보인다.

오르다 보니 이미 예전에 참호를 파 놓은 흔적이 보인다. 세 사람씩 조를 지어 투입된다. 가장 먼저 배정받은 조는 예전에 누군가가 파 놓았던 참호를 보수하는 일이다. 이미 낙엽이 쌓이고 흙이 무너져 모양이 흐트러진 참호를 원래 모양대로 보기 좋게 만드는 일이다. '저건 조금 편해 보이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남은 사람들은 다시 산을 오른다. 얼마쯤 가다 보니 또 다시 예전 참호의 흔적이 있다. 또 몇 사람이 투입된다. 그리고 다시 산을 오른다. '어라? 이거 어디까지 올라가는 거야?'

계속해서 사람들이 투입되고 결국 거의 산 정상에 다다르게 되었다. 오후 두 시 반. 남은 인원은 여섯 명. 두 개의 조로 나뉜다. 나와 회사 동료, 그리고 다른 한 사람. 우리가 팔 곳은······. 어라? 맨땅이다! 다른 조처럼 예전 흔적을 개·보수하는 게 아니라 맨땅을 파서 참호를 파야 한다.

그런데 '그 한 사람'이 갑자기 나선다. "일단 제가 윤곽을 그리겠습니다." 그러더니 능수능란하게 외곽을 잡고 땅을 파기 시작한다.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묻지도 않았는데 이런 말을 덧붙인다. "제가 직업이 이쪽은 아니구요, 원래 삽질하는 걸 좋아합니다." 삽질을 즐기다니! 대단한 내공이다! 나도 일하면서 이런 저런 '삽질'은 많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삽질을 즐기지는 않는데 말이다.

나와 직장 동료는 삽 하나를 번갈아 가며 삽질을 했다. 삽이 모든 사람들에게 다 하나씩 돌아간 게 아니라서 우리 조에는 삽이 두 개 밖에 없었다. <삽질의 달인>은 혼자서 우리 두 사람 몫보다 더 많은 일을 해내고 있었다. 가히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조금만 삽질을 해대도 금세 지쳐 숨을 헐떡이는데 <삽질의 달인>은 전혀 지친 기색 없이 땅을 파내고 있었다. <달인>은 철원에서 군 생활을 했는데, 거기에서 참호를 많이 만들어 본 모양이다. 그곳에서 공사를 할 때에는 나중에 비로 인해 토사가 흘러내려 참호가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벽돌로 마무리를 하는데 이곳은 그런 게 없어서 아마 나중에 비로 무너질 거라고 했다.

내가 놀란 것은, 그 사람이 참호를 만들 때 보여 준 능수능란함 뿐만이 아니었다. 예비군 훈련에서 그렇게 열정적인 모습으로 일을 해 내는 것이 더욱 놀라워 보였다. 아마도 자신의 다른 일에서도 그런 열정을 발휘하고 있으리라.

동대장이 한 바퀴 돌다가 우리 참호를 발견했다. 그리고는 칭찬 릴레이를 시작했다. 이웃 조원들을 불러 참고하게 하고 참호 공사 장면을 카메라로 찍었다. <삽질의 달인>이 거의 다 한 일이나 마찬가지이다 보니 옆에서 그런 이야기를 듣기가 민망했다.

네 시 반. 모든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평소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던 삽질이, 오늘따라 참 대단하게 생각되었다. 그리고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예비군 훈련에서 그렇게 힘을 쏟아 일하던 <달인>을 보며, 참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내려오는 길에 편의점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달인>에게 먹을 것이라도 좀 사 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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